요즘에는 글 쓸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밤늦게(물론 제가 말하는 늦은 밤은 여러분에게는 초저녁이 아닐까 싶네요)까지도 글을 쓸 때가 종종 있지요. 이렇게 글을 쓰다보면 갑자기 시장기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곧바로 부엌에 가서 토스트를 해 먹거나 또는 라면 하나 끓여 먹습니다. 그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며칠을 계속해서 밤참을 먹었고, 또한 저녁에 모임이 있으면 술 한 잔 하면서 많은 안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이상하게 변한 저의 모습을 욕실의 거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랫배만 뽈록 튀어나온 배를 보면서 이제는 안 되겠다. 이제 야참은 그만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습관이 얼마나 무섭던 지요. 그 시간만 되면 또 다시 고파하는 배. 또한 왜 이렇게 배가 출출할 때만 되면 모임이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저의 결심은 작심삼일도 지키지 못했고, 배는 여전히 뽈록 튀어나온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있었던 일입니다.
늦게까지 글을 쓰고 있는데 또 다시 배가 고파지는 것입니다. 머리에서는 ‘참아야 해. 살쪄~~’를 말하고 있지만, 몸에서는 ‘혼자 사는데 몸매를 왜 신경 쓰니?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더라. 먹어~~ 맘껏 먹어~~’를 외치고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글 딱 3장만 더 쓰고서 뭔가를 먹자고. 빨리 쓰면 30분, 아무리 천천히 써봐야 1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이 정도만 참자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했지요.
드디어 3장의 글을 다 썼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먹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시장감과 이에 따른 행동 사이에 있었던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뭔가를 먹고 싶다는 시장함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던 것이지요.
나의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조금만 참으면 별 것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그 조금의 인내가 없어서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은 아닐까요? 더군다나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신 분으로 우리의 힘듦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내치지 않으시고 끊임없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한 마리의 양과 은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명 한 명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곧이어 ‘탕자의 비유’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하지요.
사실 세상에 그런 아들이 있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자기에게 올 유산을 미리 달라니요. 말도 안 되는 것이며 불효막심한 아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아마 이 작은 아들의 모습에 아버지와 형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을 듣지 않아서 벌을 받은 것일까요? 방탕과 사치를 일삼던 작은 아들은 쫄딱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이 순간 아무 말 하지 않고 꼭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 바로 최고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인데, 우리들은 과연 이러한 주님께 어떻게 다가설까요? 조금 힘들다고 이를 참지 못하고, 주님을 배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에 비해 너무나도 작아지는 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이상하게 변한 저의 모습을 욕실의 거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랫배만 뽈록 튀어나온 배를 보면서 이제는 안 되겠다. 이제 야참은 그만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습관이 얼마나 무섭던 지요. 그 시간만 되면 또 다시 고파하는 배. 또한 왜 이렇게 배가 출출할 때만 되면 모임이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저의 결심은 작심삼일도 지키지 못했고, 배는 여전히 뽈록 튀어나온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있었던 일입니다.
늦게까지 글을 쓰고 있는데 또 다시 배가 고파지는 것입니다. 머리에서는 ‘참아야 해. 살쪄~~’를 말하고 있지만, 몸에서는 ‘혼자 사는데 몸매를 왜 신경 쓰니?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더라. 먹어~~ 맘껏 먹어~~’를 외치고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글 딱 3장만 더 쓰고서 뭔가를 먹자고. 빨리 쓰면 30분, 아무리 천천히 써봐야 1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이 정도만 참자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했지요.
드디어 3장의 글을 다 썼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먹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시장감과 이에 따른 행동 사이에 있었던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뭔가를 먹고 싶다는 시장함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던 것이지요.
나의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조금만 참으면 별 것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그 조금의 인내가 없어서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은 아닐까요? 더군다나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신 분으로 우리의 힘듦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내치지 않으시고 끊임없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한 마리의 양과 은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명 한 명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곧이어 ‘탕자의 비유’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하지요.
사실 세상에 그런 아들이 있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자기에게 올 유산을 미리 달라니요. 말도 안 되는 것이며 불효막심한 아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아마 이 작은 아들의 모습에 아버지와 형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을 듣지 않아서 벌을 받은 것일까요? 방탕과 사치를 일삼던 작은 아들은 쫄딱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이 순간 아무 말 하지 않고 꼭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 바로 최고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인데, 우리들은 과연 이러한 주님께 어떻게 다가설까요? 조금 힘들다고 이를 참지 못하고, 주님을 배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에 비해 너무나도 작아지는 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갖고 나의 가족을 꼭 껴안아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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