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과 사랑

복음 요한 20,19-31 [빠심]

민트로사 2009. 4. 19. 14:12

 

 

 

 

복음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중동 아시아에 파견되었던 콜라 회사의 영업사원이 좌절하고 돌아왔습니다. 한 친구가 물었지요.

“자네는 어디를 가든 다 성공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아랍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거지?”

영업사원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중동에 파견되었을 때, 콜라는 그곳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매출을 쉽게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었지. 그런데 나는 아랍어를 못하니까 포스터 세 개로 사람들에게 콜라를 전달하려고 했어. 첫 번째 포스터는 한 남자가 완전히 탈진하여 뜨거운 사막에 쓰러져 있는 장면이지. 그리고 두 번째 포스터는 이 남자가 우리 회사의 콜라를 마시는 것이라네. 마지막 세 번째 포스터는 원기를 회복한 남자의 모습이지. 이 세 개의 포스터를 곳곳에 붙여놨네.”

친구는 “그럼 효과를 봤겠네.”라고 말하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업사원은 손사래를 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놓친 게 있었어. 아랍인들은 오른쪽부터 읽기 때문에 우리 포스터의 내용을 반대로 이해했더라고.”

결국 아랍인이 이해한 포스터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원기를 회복한 남자가 콜라를 마시고서 완전히 탈진한다는 내용이 되겠지요. 즉, 이 영업사원이 의도했던 내용과 정반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영업사원의 체험은 우리들도 종종 경험하는 것이지요. 내 뜻은 그것이 아닌데, 상대방은 정반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따라서 서로간의 이해의 폭을 줄이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해를 없애고 일치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토마스 사도의 의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왜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요? 이 모습은 제자들만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앞서 포스터를 잘못 이해하였던 아랍인들처럼, 토마스는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수난 - 십자가상의 죽음 - 부활이라는 세 장의 포스터로 요약되지요. 이렇게 순차적으로 봐야 하는데 토마스는 이를 거꾸로 보았습니다.

먼저 부활의 장면을 보면서 살아계셨었을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모습이 십자가의 죽음을 가져왔다고 생각했고, 이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지요.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제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제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의심을 버리고 예수님께 제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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