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서울 신림동 산동네의 한 자취방에서 연탄을 땠습니다. 탄불을 꺼뜨리기 일쑤여서, 밤이면 동네 구멍가게에서 번개탄을 사와 피우곤 했지요. 번개탄의 지지직거리는 파열음은 꽤 들을 만했습니다. 불 피우는 게 귀찮으면 반주로 소주 한 병을 쭉 들이키고 술기운으로 냉골에 드러눕곤 했습니다.
신문사에 입사했어도, 연탄은 아직 중요했습니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는 빈번히 사회면에 등장했지요. 그때는 사망자 얼굴 사진을 꼭 실었습니다. 신문에 실리는 사진꼴이 원형(圓形)이어서, 일본어를 차용해 '마루 사진'이라고 했지요. 이를 구하러 가는 것도 큰일이었습니다. 뻔히 짐작하겠지만, 연탄가스 중독은 'XX동 몇 통 몇 반 산 몇 번지'로 주소가 긴 달동네에서 주로 발생했습니다. 제가 살았던 자취방의 동네처럼 당시에는 누군가 쓰레기통에 버린 복어 알과 내장을 주워 끓여 먹다가 숨지는 '풍습' 사건도 많았습니다.
불과 20여 년 전인데 마치 아득한 기억처럼 됐습니다. 요즘 연탄 때는 사람은 주변에서 거의 보이지 않지요. 저도 더 이상 연탄집게에 불붙인 번개탄을 꽂고서 연탄 구멍과 맞출 일은 없습니다. 연탄 한 장 값이 얼마인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여전히 연탄을 때고 있습니다. 한 통계로는 25만 가구나 된다고 합니다. 정부는 내년 4월쯤 연탄 소비자 가격(공장도 가격+배달료)을 장당 337원에서 403.25원으로 19.6% 인상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연탄값은 남의 얘기처럼 들립니다. 아마 승용차에 넣는 기름값이면 좀 더 반응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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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의 시선(視線)으로 봅니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지요. 아비가 되면 자식의 마음이 안 보이고, 자식은 아비의 마음이 요령부득이지요. 직장 상사가 되면 부하직원의 시절을 잊고, 부하 직원은 퇴근하지 못하는 상사의 고민을 가볍게 여깁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도 시선의 방향과 높낮이가 다른데, 하물며 바깥 세상으로 가면 어떨까요. 가령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 보행자들의 일상이 잘 안 보입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깜박깜박 꺼져가는데도 느긋하게 걷는 보행자들을 보면 성질이 확 치밀지요. 반면 보행자들은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너무 금방 꺼진다고 느낍니다. 또 차를 모는 인간들의 무례와 무모함에 분개하면서, 옛날 성질 같았으면 보닛을 후려치고 말았겠지요.
지하철을 안 타본 사람은 지하철 요금이 얼마인지 잘 모릅니다. 지하철 안의 풍경이 어떤지도 알 수 없지요. 아마 도시의 지하 공간에도 사람들이 먹고살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저는 당연히 모든 게 지하철인 줄 알았습니다. 어느 날 시내버스를 타고서 많은 승객들을 보고는 혼자 신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버스에 탄 승객들은 그것이 일상인데도 말입니다.
세상의 삶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한정된 생에서는 두루 경험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한 공간 속에 몹시 다양하고 상충되는 삶들이 모여있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똑같은 장면에서 우리가 기세 좋게 웃을 때 누군가는 한숨짓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우리가 양지(陽地)에 나와있으면 틀림없이 그늘도 있다는 것을.
이명박 당선인의 성장경제 정책에 저명인사들과 매스컴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성장은 늘 우리의 바람이었지요.
그럼에도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간격을 더 넓히지 않을지, 지금도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캄캄하게 만들지 않을지,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숫자를 더욱 늘리지는 않을지 일말의 우려도 있는 것이지요. 혹 잘 보이는 것들만 외딴 섬처럼 사방으로부터 고립될지 모릅니다.
공자는 '불환빈이환불균'(不患貧而患不均: 가난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못함을 걱정한다)이라고 했습니다. 공자가 사회주의자일 리는 없겠지요. 올해도 함께 할 독자 여러분, 첫 주말 잘 보내십시오.
최보식 기자 | 2008.1.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