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과 사랑

58년전 크리스마스 이야기,

민트로사 2008. 10. 31. 00:48

 

 


 
송봉모 예수회 신부님의 책, 순례자 아브라함 1에 나오는 실화를 옮겨 봅니다.


한국전쟁 중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던 1950년 12월 23일.
레너드 P.라루라는 이름의 37세 선장은 한국의 흥남 부두에 대기 중이었다.
그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해외 군사시설에 보급품과 장비를 수송하는 1만톤급 화물선이었다.

12월 20일 저녁에 도착한 메러디스 호에
미 육군 제10군단 죤 H.차일즈 대령이 승선했다.
그는 라루 선장에게 상황설명을 하면서 피난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지만
피난민 얼마라도 구할 수 없겠는가를 물어왔다.
선장은 전혀 망서리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가능한 한 많은 피난민을 태우겠습니다”

총부리를 겨누고 뒤쫓는 공산정권을 피해 정든 고향을 등지는 피난민,
오직 생존만이 유일한 관심사인 수많은 피난민들이 운집해 있는 부두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저 멀리 흥남 시가지는 화염에 싸여 벌갰다.
승선 작업은 12월 22일 저녁부터 시작돼 밤을 새우고도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됐다.
드디어 배에는 한 치의 공간도 없이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사람들로 채워졌다.
14.000명 승선에 부상자 열 일곱 명, 만삭의 임산부 다섯 명.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들은 승선해 있었다.

그만한 공간이 있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있었다.
화물선으로 건조된 그 배는 그 많은 숫자의 피난민을 수용할 아무런 시설도 갖춰있질 않았다.
12명의 상급선원과 승무원 35명을 태울 수 있도록 설계된 메러디스 빅토리호.
배 안에는 여분의 구명보트도 구명구의도 없었다.
물과 음식물도 없을 뿐더러 화장실도 의사도 통역관도 없었다.
연근해 10킬로미터 안에는 기뢰가 거미줄처럼 매설되어 있는데 기뢰 탐지 장비도 없었다.

아무 사고없이 무탈했던 3일간의 기적 같은 항해.
모든 논리의 법칙으로 볼 때 인명손실이 엄청날 수 있는 조건임에도
한명의 희생자도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기적이었다.
오히려 그 배안에서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2004년 영국 기네스북 본부로부터 인증된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세계 기록을 세운 빅토리 호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만 사천 여명을 죽음에서 건져낸 라루 선장,
그는 1954년 세속을 떠나 뉴저지 주 뉴튼에 있는
성베네딕도 수도회 중 하나인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갔다.

흥남에서의 기억이 절대적 요인은 아닐지라도
신앙심 깊은 그를 수도원으로 인도한 여러 요소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는 이후 2001년 10월 선종할 때까지 46년을 한결같이 한 자리에 머물며
마리너스 수사라는 수도명으로 순명과 청빈의 수도자 삶을 살천하였다.

‘일하면서 기도하라’는 수도원 정신대로 그는 크리스마스 트리 농장을 가꾸다
만년에는 수도원 내 성물판매점을 돌보며 아주 조용히 살았다.
의사를 만나러 가는 일 외에는 수도원 밖을 나간 적 없던 그는
단 한번 정부의 특별상 수상자로 워싱턴에 다녀온 일이 있을 뿐이며
1958년에도 한국정부가 그에게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려고 초대했을 때도
그는 수도원의 문을 나서지 않았다.

훗날 그가 고백하기를,
당시 피난민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했을 때
그의 마음 깊이 담겨있던 주님의 말씀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는 말씀이었다.

오묘한 하늘의 섭리인가 인연의 귀결인가
수많은 북한 피난민을 사지에서 구해낸 라루 선장,
2001년 94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그 마리너스 수사가 머물던 수도원이
미국 내 수도자 감소로 폐쇄지경에 놓이자
뜻밖에도 왜관 분도수도원에서 위탁운영을 맡게되며
문을 닫으려던 수도원은 현재 한국인 수사들로하여 활기차게 부활해가고 있다
오래전 흥남에서의 은공에 대해,형태를 달리한 한국인의 아름다운 보은이다

'은총과 사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 8,22-26 [빠심]  (0) 2009.02.18
패러다임의 전환  (0) 2008.12.09
회개  (0) 2008.10.13
세상을 역행할 힘  (0) 2008.08.26
많이 힘들다고 생각하나요?  (0) 2008.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