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6세, 규석]
집을 그리는 순서
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
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
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
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 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書架)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한동안 그 노인의 얼굴을 상기합니다.
차치리라는 사람이 장에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하여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습니다.
한자로 그것을 '탁'이라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장에 갈 때는 깜박 잊고 탁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신발가게 앞에 와서야 탁을 집에다 두고 온 것을 깨닫고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탁을 가지고 다시 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장이 파하고 난 뒤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까
지 갈 필요가 어디 있소. 당신의 발로 신어 보면 될 일이 아니요." 차치리가 대답
했습니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
주춧돌부터 집을 그리던 그 노인이 발로 신어 보고 신발을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탁과 발, 교실과 공장, 종이와 망치,
의상과 사람, 화폐와 물건, 임금과 노동력, 이론과 실천 …. 이러한 것들이 뒤바뀌
어 있는 우리의 사고를 다시 한 번 반성케 하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돌베개]
<좋은생각, 2001년 4월호,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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