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를 보며 왜 하필 380년 전 병자호란이 떠올랐을까.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는 닷새 만에 한양 근처까지 들이닥쳤다. 외적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烽火)나 장계(狀啓) 같은 긴급 연락 시스템이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국왕 인조(仁祖)와 조정 대신들이 뒤늦게 허둥지둥 대책회의를 열었다. 거기서 주로 논의한 것은 어디로, 어떻게 도망갈까였다.
▶12월 15일 인조는 울부짖는 백성을 뒤로 하고 조정을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왕실과 고위 관료의 가족들은 강화도로 보냈다. 강화도 피란을 책임진 자는 그 와중에 귀한 말(馬)을 동원해 50개나 되는 재물 궤짝을 따로 실어날랐다. 바다를 건널 때는 가장 튼튼하고 좋은 배에 자기 식솔들을 먼저 태웠다. 남한산성은 산세가 험한 데다 한양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그러나 청나라 병사는 날쌔고 힘센 14만명, 우리는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1만5000명이었다. 빈 가마니를 방한복 삼아 두른 우리 병사들은 동상에 걸려 손과 발을 못 움직였다.
▶남한산성에서도 관료들은 청과 싸울 것인가, 화친할 것인가 자기들끼리 싸움으로 날을 지새웠다. 왕은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니 개탄스럽다"며 신하들을 책망했다. 그러는 사이 지켜줄 군사도, 이끌어줄 조정도 없는 성 밖 백성은 속수무책 오랑캐에 당했다. 부녀자와 아이들이 특히 그랬다. 먹을 것도, 버틸 힘도 떨어진 46일째 되는 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장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날 밤 국왕이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돌아올 때 신하들은 서로 먼저 배에 타려고 또 싸웠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엊그제 남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해도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남한산성에는 적의 침입을 막는 성곽과 함께 국왕이 살았던 행궁(行宮) 등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은 "남한산성이 갖고 있는 건축이나 조경, 도시계획의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재들이 하나라도 더 '인류 문화사의 보편적 가치'를 평가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남들은 몰라도 우리는 남한산성 곳곳에 스며있는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잊을 수 없다. 관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책임하다. 능력도 없는 데다 제 몸 보신에 급급한 위정자를 둔 탓에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얻어맞으며 심양(瀋陽)에 끌려간 50만명의 죄 없는 백성이 눈에 어른거린다.
[조선일보 5.2.2014]
새삼 남한산성의 역사를 보니...
뭐가 다를까.... 싶다.
예나 지금이나...
세월호 참사와 몇 백년 전의 모양새가 어찌 이렇게도 닮았는지...
세월호와 함께 2014년의 봄은 참으로 서럽고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직도 찾지 못한 실종자와 함께,
자식을 잃은 어미의 절규와 고통으로...
minr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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